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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이라는 단어의 마력

Created
2022/02/05
Tags
Opinion
Retrospect
IT
Culture
“적”이라는 글자는 참 자주 쓰입니다. “사회적 문제”, “경제적 문제”, “논리적 표현” 등등... 하지만 의외로 대부분의 경우 “적”자를 빼보면, 단어의 뜻이 더 명확히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 문제”, “경제 문제”, “논리가 선 표현” 등등 과 같이 말이죠. 생각해보면 당연합니다. “적”이라는 접미사의 역할이, 의미의 경계를 약간 흐릿하게 만드는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국어사전에 수록된 “적”의 정의. “그 성격을 띠는”이라는 뜻을 더하는 접미사
“적”이라는 접미사에게는 분명 그 역할이 있습니다. “이 단어로 표현하기 애매한” 대상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때, 이 “적”이라는 접미사를 사용하면, 더 정확한 단어를 찾지 않고도 의미를 구성할 수 있죠. 어떤 명제가 철학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 “철학적이다”라고 표현 할 수 있는 것 처럼요. 그러니까 “적”은 일종의 언어생활의 긴급패치와 같은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 긴급패치는 사용하기 쉬운 만큼 남용되기도 쉽습니다. 예컨대 “가정적인 남자”는 대체 어떤 남자일까요? 10사람이 모이면 10사람 마다 다 제각기 “가정적” 이라는 단어를 다르게 해석 할 것입니다.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기기 위한 단어 선택이라면 괜찮지만, 어떤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서라면 “적”이라는 단어를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컨대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을 말하는 것인지, “아이들에게 시간을 많이 쓰는 아버지”를 말하는 것인지 등등, 그 이야기의 맥락에 맞는 더 정확한 단어를 고르는 노력이 더 선명한 글쓰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IT 업계에서 단연코 남용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기술적” 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합니다. 기술적이라는 단어도 앞의 예시와 마찬가지로, 많은 경우 그냥 쓰지 않음으로써 문장을 더 명확히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술적으로 만들기 어렵습니다 → 이것은 만들기 어렵습니다
기술적으로 가능합니다 → 가능합니다
기술적으로 우려되는 점 있을까요? → 우려되는 점 있을까요?
기술적으로는 이렇게 구현하고, 나머지는 UX적으로 풀어봅시다.
이 한계는 이렇게 처리하고, 사용흐름을 개선해 유저가 문제를 느끼지 못하게 합시다.
이 문제는 기술적으로 풀 수 없으므로 기획적으로 풉시다.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기술은 없습니다. 기획을 수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느끼는 더 큰 문제는, “기술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긋지 않아도 되는 “경계”를 긋게 되는 일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기술적으로 성장을 하고 싶다” 는 표현을 봅시다. 이런 문장은 해석하기에 따라 “인간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내가 추구하는 노력의 경계 밖에 있다는 뜻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특히 요새는 좀 덜 하지만, 아직까지도 “프로그래머”라고 하면, 의사소통이 서툴고 혼자 구석에 처박혀서 열심히 코딩만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꽤 강하게 퍼져있는 것 같습니다.
“마트가서 우유 사고, 아보카도 있으면 6개 사와”라는 주문에, “아보카도가 있었기에 우유를 6개 사오는” 남편.
“기술적인 성장”에 대한 강조는 이런 이미지에서 나왔을 수도 있고, 이런 이미지를 강화시키기도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더 좋은 프로그래머가 되기 위해 의외로 가장 필요한 것은 주변에 도움을 잘 구하는 능력, 도움을 잘 받는 능력, 도움에 감사하는 능력, 도움을 잘 주는 능력과 같은, “인간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기술적인 성장”으로 내 성장의 경계를 가두기 보다는, 내가 성장해야 하는 측면이 무엇인지를 더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고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고민 일수록, 미루지 않고 더 자주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적”이란 단어는 이런 고민을 흐릿하게 뭉개는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비슷한 사례로, “기술적인 이슈”와 “기획적인 이슈”를 구분하려는 경향은 어렵지 않게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획자와 기술자의 역할이 대단히 구분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또 거꾸로 그러한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구분에 의하면 “기획서 작성”이나 “기획서 검토”등은 “기술적이지 않은 행위”에 속하죠. 하지만 저는 이게 그렇게 칼 같이 구분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개발자는 코딩에 들이는 것과 맞먹는(사실은 그 보다 더 많은) 시간을 기획서를 검토하는데 들여야 합니다. 기획서를 충분히 이해하고, 검토하지 않아서 나중에 개발 과정에서 기획과 다른 개발을 하거나 또는 기획에서 누락한 항목에 대해 뒤늦은 고민을 하게 되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획서 검토는 현실적으로 개발자의 업무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기술적”인 일입니다. 그런 한편, 그런 기획서를 작성하는 능력도 하나의 기술이고, 기획자도 그런 의미에서의 기술자입니다. 개발자들이 다루는 것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복잡도를 다루고 길들이는 분들이 기획자들이고 디자이너들입니다. 프로그램의 복잡도를 개발자 혼자서 길들이려고 끙끙대지 않고, 기획자 및 디자이너분들과 고민을 공유하고 협업하면, 그 분들이 놀랍도록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시단 것을, 그리고 그 분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런 의미에서 게임업계에서는 게임을 만드는데 참여하는 모든 인원들을 “개발자”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저는 이게 비단 게임업계에만 한정되어야만 하는 풍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술적”이라는 단어로 경계를 긋지 않는다면, 우리는 훨씬 다양한 사람들과 긴밀히 협업하며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을 피하는 일은, 처음 시도해 본다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노력은 우리의 언어와 생각을 놀랍도록 더 선명하게 만들어줍니다. 뭉개진 의미 뒤에 숨지 않고 더 책임감 있는 언어를 쓰게 만들고, 더 또렷하고 단순하며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쓰게 만들어줍니다. 속는 셈 치고, 꼭 한 번 시도해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