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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82년생 김지영

Created
2019/11/16
Tags
Book
Review
Literature
Feminism
화상은 그 깊이에 따라 표피만 손상된 1도, 진피가 손상된 2도, 피하지방까지 손상된 3도로 분류된다. 당연히 3도화상으로 갈 수록 더 고통스럽고 치료도 어렵다. 하지만 국지적인 3도화상보다 전신에 걸친 1도화상이 당장의 고통은 적을 수 있지만 생명에는 훨씬 치명적이다. 국지적인 화상은 아무리 심하고 고통스러울 지라도, 그 부분만 절단해내면 생명에 지장이 없지만, 전신에 걸친 미미한 화상은 온몸의 수분을 소모시켜 급격한 탈수를 일으키게 되고 빠른 시간 안에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
『82년생 김지영』에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심한 모욕과 욕설이 나오지도 않고 끔찍한 폭력이 난무하지도 않는다. 책은 우리가 몰랐던 어떤 새로운 모순도 고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책의 주인공 김지영씨의 삶은 순탄한 편이다. 여아 낙태가 횡행했던 시절에 낙태되지 않았고,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덕에 경제적으로 큰 부족함 없이 자랐다. 수완이 있던 어머니 덕에 대학등록금이 치솟던 시절 학자금 대출 없이 대학을 다녔고, 여성 채용률이 30%정도인 시절에 업계에 이름이 알려진 중견기업에 취업했다. 집안일도 많이 도와 주는 좋은 남편을 만나 평온한 가졍을 꾸렸다.
책은 충격적인 폭력을 폭로하지 않고, 그저 우리가 누구나 목격했고 참여했던, 또는 별 생각 없이 지나쳤던 모순들을 사근사근 건든다. 너무나 사소해서 아무렇지 않게 지나곤 했던 그런 모순들. 여학생들의 속옷과 양말을 학교가 규제하는 일, 남자는 1로 시작하고 여자는 2로 시작하는 주민번호를 갖는 일, 출산을 강요받는 동시에 출산으로 사회에서 도태되는 일 등등. 끝이 없는 사소한 불합리들은 쌓이고 쌓여서 우리 마음 속에 전신 1도 화상을 남긴다.
김지영씨보다 끔찍한 폭력과 모순을 겪은 여성들은 많다. 지방에 사는 여성, 이주민 여성, 학력이 짧은 여성들은 김지영씨가 누리는 여러 혜택은 누리지 못한 채 지금도 커다란 폭력을 견디며, “다들 이렇게 산다”고 서로를 위로한다. 그런 분들의 끔찍한 현실을 고발하는 내용의 소설이나 르포가 결코 없지 않았고, 그런 컨텐츠들의 반향도 결코 작진 않았다.하지만 가장 끔찍한 현실들은, 그 현실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비현실처럼 들리기 마련이다. 마치 너무 큰 고통을 주는 3도 화상들이 치유되지 않고 도려지듯이, 겪어보지 않은 끔찍한 현실들에 대한 고발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우리의 인식 속에서 지워지곤 했다.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사회 뿐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잔잔하지만 무시하고 넘길 수 없는, 치명적인 전신 1도 화상을 입히고 있다. 김지영씨의 삶이 한국적 특수성을 감안하고서도 너무나 평범하고 평온했기 때문일까. 이 잔잔한 불길의 끝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세대는 우리가 겪었던 고통을 다시 겪지 않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