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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트윗 총결산

Created
202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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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원래는 1년 회고를 쓰려 했는데, 작년, 그리고 제작년 회고를 보면서 느낀 게 있다. 연간 회고는 유용하지 않다. 회고의 사이클이 길면 길수록, 회고를 통해 얻는 피드백은 약해진다. 주간, 월간 회고 정도가 의미가 있다. 따라서 1년을 돌아보며, 회고를 하기 보다는 정리를 해보았다. 정리의 방법으로 각 달 별로, 내게 가장 중요했던 순간을 기록한 트윗 1개에서 최대 3개를 엄선해, 그 때 했던 생각을 부연하거나, 지금 드는 생각을 비교해 적었다.

1월

7월에 이사 하자마자, 집 앞의 뭉게뭉게 구름 피는 굴뚝이 있는 빨간 지붕위에 하얀 눈이 내리는 날을 상상했다. 산타클로스가 방문할 것 같은 그림이 현실에 펼쳐졌을 때,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았다.

2월

신규 입사한 주니어 개발자가 맘편하게 새로운 기능을 만들 수 있도록, 유저가 거의 방문하지 않는 곳에 새로운 서비스 하나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피그마로 디자인도 하고, 서버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도 받고 과로도 했지만, 올해의 가장 큰 성장을 할 수 있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아직 서버 개발을 자유자재로 할 순 없지만, 필요한 순간에 언제든 뛰어들 순 있다는 자신감 정도는 얻었다.
백기완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 “먼 길을 가는 사람은, 고개는 들어도 허리는 굽는거야”라고 하셨던 선생님. “부심이의 엄마생각”을 오랜만에 다시 꺼내 읽었다.

3월

변희수 하사님이 돌아가셨다. 군대가 조금이라도 바뀌려는 순간, 변 하사님이 용기를 낼 수 있는 수준의 진보를 목격한 순간, 변하사님의 동료들과 군단장급의 고위 인사들마저도 이제 트렌스젠더가 외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그 다음 순간. 국방부의, 언론의, 그리고 혐오를 즐기는 사람들의 돌팔매로 소중한 생명이 꺼졌다.
아내는 정말 유능하다. 회화과 졸업하고, 북디자이너를 하다가, 이제는 IT 기업의 디자이너다. 그러면서도 그림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아름다움을 만들고 있다.
최근에 아내는 미대 회화과 친구들과 줌으로 아이패드 드로잉을 함께 배우고 있는데, 19세기 스타일의 그림을 전통 회화과 출신들이 아이패드에 그림그리는 법을 화상채팅으로 배우고 공유하는 모습이... 정말 21세기 같았다.
정말 암울한 선거였고, 결과 또한 그랬다. 모두가 용산 참사를 잊은걸까?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희망을 채굴해 본다. 군소 정당의 후보들이 모두 소외된 약자들에 대해 진지하고 체계적으로 고민했다. 그런 고민들이 선거를 통해 더 많이 퍼졌기를, 앞으로 더욱 퍼질 수 있기를 바란다.

4월

내가 낸 목소리를 듣고, 다른 누군가가 화답하는 경험은 강력하다. 특히나 그 다른 누군가가 내가 평소 존경하던 블로거라면 더욱 그렇다. 앞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저시력자를 고려해 앱을 만들기를 바란다.
야심차게 세웠던 계획에 비해선 다소 결과물이 초라하다. ‘겉핥기’는 충분히 하긴 했다. 이제 React로 뷰와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은 대략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웹에서 접근성을 제대로 지원하기란 네이티브에 비해 훨씬 어려운 일이란 것도 알았다. 그러나 아직 서비스 하나를 제대로 구현해보지 못했다. 내년에는 다시 한 번 시도해 봐야지

5월

내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가장 큰 비결이라고 생각하는 부분. 한국남자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기. 이걸 해 냈기에 나는 내 안의 한남충을 발견할 때에도 아내와 함께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더 많은 한남충들이 이 비밀을 함께 깨달아 가기를 바란다.

6월

작년에 쓴 블로그 글이 화제가 되어 다양한 만남의 기회가 생겼다. 특히 블로그 글을 쓰는데 결정적 계기를 준, “장애학의 도전” 을 쓰신 김도현님께, 별도의 감사의 메일을 보낸 일이 있다. 평소에 막연하게 생각하던 내용을 체계적으로 깔끔하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그 덕분에 내가 이런 글을 썼고, 많은 분들이 공감해주셨다고.
도현님께서도 감사의 답장을 보내주셨고, 그 이듬해에는, 도현님이 몸담고 계셨던 비마이너에서 과학잡지 에피 와 콜라보 기획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 때 도현님께서 내 글을 이 기획에 함께 실리도록 추천해 주셨고, 영광스럽게도 존경하는 SF작가님이었던 김초엽님으로 부터 원고 청탁 의뢰를 받았다.
한 순간 한 순간 만나는 인연마다 최선을 다하고, 손을 내밀고 감사를 표하는 일이 이렇게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내 글이 잡지에 실렸다는 사실보다, 그 글이 실리게 된 모든 과정이 뜻깊고 인상깊었다.
쿠팡에서 불이 났고 사람이 많이 죽었다. 불이 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사람들이 대피할 수 없었던 이유들이 너무나 익숙했고, 그것이 화가났다. 참고로 우리 집은 쿠팡에 의존도가 높았고, 그래서 아내와 생활비 전용 신용카드를 만들 때도, 쿠팡에서 가장 많은 혜택이 있는 신용카드를 선택했다. 그랬던만큼 분노가 더 컸고, 멤버십을 해지 할 때의 아쉬움도 컸다. 아직 쿠팡은 변화하고 있지 않다. 아직도, 지표 뒤에 사람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7월

우리는 “약속의 8월”을 향해 내달렸다. 그 일정이 수 개월 뒤로 밀렸을 때의 실망과 허탈감은 참 컸다. 12월에도 또 밀리진 않을까 하는 불안도 커졌다. 다행히 지금은 일정이 잘 지켜졌고, 우리는 마이데이터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다.

8월

꽤 오랫동안 제텔카스텐 을 실천했다. 매일 10시 부터는 꼭 책을 읽고, 그 과정에서 알게된 것, 생각한 것을 짧게 간추렸다. 결과는 매우 좋았다. 제텔카스텐으로 요약했던 내용들을 엮으니, 서평 한 개가 뚝딱 써지는 경험도 했다. 연말에는 일이 너무 바빠 실천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시 정신 차리고, 이 습관을 다시 가져와야겠다.

9월

올해 회사에서 했던 가장 즐거운 경험. 우리 구성원들의 열정과 역량을 확인 할 수 있었던 시간. 내 역량을 구성원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던 날. 정말 맛있는 음식과 좋은 음악과 멋진 야경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그리고 이사오면서 처분하게 된 무중력 의자와 마지막으로 보냈던 밤.
여차저차 하다가 하남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산책 할 수 있는 공원이 있고, 그 곳에서 드넓은 하늘과 호수를 볼 수 있어서 정말 즐거운 하남. 식기세척기와 TV를 놓을 수 있게 되어, 아내와 조금 더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게 된 하남의 새 보금자리.

10월

전두환을 죽이지 못한 대가의 무거움을 많이 느낀 해였다. 이낙연은 이명박 박근혜 사면을 말했다. 노태우는 국가에서 장례식을 치뤄줬다. 끝끝내 전두환은 천수를 누리고 갔다. 약한 사람들은 매일 죽어나갔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다. 사람을 죽인 파렴치한들은 모두가 기억해주고 대우받았다. 대규모의 섬뜩한 파렴치함에 몸을 떨었다.

11월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시기인 50대 중반. 평생의 꿈을 위해 모든 직장을 내려 놓고, 코로나가 터지기 딱 1년 전인 2019년에 캠핑카를 타고 세계여행을 하신 부모님. 세계여행에서 돌아와 2020년에는 해남에 캠핑카보다 약간 더 넓은 집을 지으신 부모님.
2021년에는 시골의 쓰레기 배출문제에 관심을 가지시고, 직접 동네의 분리수거장을 멋지게 만드시고, 쓰레기를 주우러 다니시고, 지역 주민들을 설득해 마을 하나를 천천히 바꿔가셨다. 길다고 할 수 없는 시간 동안, 마을에서 쓰레기 분리배출은 어느덧 상식이 되었다.
그 과정이 지역 신문에 실리더니, 이윽고 여러 방송사에서도 부모님을 취재하러 왔다. 그 중 국민TV에서는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주간에 부모님을 찾아 부모님이 살아가는 방식을 담아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부모님의 모습을 심층적으로 볼 수 있어서 즐거웠고, 또 자랑스러웠다.

12월

올 한 해 가장 즐겁게, 그리고 인상깊게 본 유튜브 채널은 “지켜츄(지구를 지켜 츄)”였다. 기후재난에 대해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고민에 함께 할 수 있도록 보는 내내 다양한 즐거움을 넣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구성하고 연출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자극과 선정성 일변도로 변해가고 있는 미디어 시장에서 내게 한 줄기 빛과 같이 다가왔다. 보는 내내 즐거웠고 행복했고, 그러면서도 내가 생각해야 할 불편함을 남기는 프로그램이었다.
회차를 거듭할 수록, 츄와 제작진 모두가 점점 더 환경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도, 그리고 시청자들이 그 고민에 함께하게 되는 과정이 정말 즐거웠다.
지금 츄의 소속사에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루머도 들리고, 그래서 지켜츄의 다음 시즌이 불투명해보여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부디 지금의 상황이 잘 마무리 되고, 머지 않은 미래에 다음 시즌의 지켜츄를 함께 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접근성에 관한한 참 많은 말들을 쏟아낸 한 해였다. 하지만 쏟아낸 것에 비해 변화를 체감하기 어려웠다. 사실 지쳐간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절망스럽다. 함께할 동지를 찾기 어려운 것이. 답답하다. 욕을 하고 싶다. 수천만원씩 고액의 연봉을 받아가면서도, 가장 기본 중의 기본 조차도 지키지 않는 그 많은 개발자들에게. 회원가입이 안 되는 앱을, 로그인이 안 되는 앱을 만들면서도 버그가 있는 줄 조차 모르는 그 많은 개발자들에게. 시원하게 욕을 한 바가지 쏟아내는 그런 상상을 한다. 하지만 나 또한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이 분노에 눈을 뜨게 되었음을 잊지 않고, 답답하더라도 천천히, 내 분노를 조금씩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옮겨 붙이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크리스마스를 1주일 앞두고 온 세상이 눈에 덮였다. 펑펑 눈 내린 날 숲속도서관을 찾았다. 부모님이 끌어주는 썰매를 타는 아이들, 귀여운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을 만났다. 마법과도 같은 순간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하염없이 흩날리는 눈발을 계속 쳐다보았다. 아이가 태어난다면, 피곤하다는 이유로 이 마법과도 같은 순간을 놓치지는 않으리라 다짐했다.